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문단 편집) === 가족 및 사생활 === 쇼스타코비치는 일생동안 세 번 결혼했는데, 1932년에 맞이한 첫 아내 니나 바르자르는 1935년에 잠시 이혼까지 갈 뻔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니나는 과학자였고, 쇼스타코비치의 예술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반려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리흐테르]]는 그녀를 '굉장히 아름답지만 음악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니나의 임신을 안 이후 정신차리고 부부관계를 가다듬어 좋은 관계를 회복했고, 1936년과 1938년에 각각 딸 갈리나와 아들 막심이 태어나 대숙청이라는 험난한 시기에 위로가 되었다. 막심은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과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고, 지금도 현역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 [[파일:Shostakovich-Nina-Varzar.jpg|width=75%]][br]쇼스타코비치와 첫 번째 부인 니나 바르자르, 그리고 비평가 이반 솔레르틴스키.[* 솔레르틴스키 역시 그 시대에 영향력 있는 비평가였지만, 요절한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친구 정도로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쇼스타코비치는 그가 죽고 20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이반이라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생각하며 곡을 쓴다"고 밝혔다. ] || 니나는 1954년에 방사능 노출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쇼스타코비치는 굉장한 슬픔에 빠졌지만 이내 제자인 [[갈리나 우스트볼스카야]][* 상당히 참신한 형식과 편성으로 곡을 썼던 여성 작곡가로,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지만 현대에는 재조명되고 있다. 그 깐깐한 [[리게티 죄르지|리게티]]도 그녀의 작품이 매우 훌륭하다고 인정했다고 한다.]에게 청혼하였다. 자식들에게도 우스트볼스카야와의 재혼에 대해서 의견을 묻기도 한 모양이나, 우스트볼스카야는 스승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2년 후 쇼스타코비치는 콤소몰의 운동가였던 마르가리타 카이노바와 1956년에 두 번째로 결혼했는데,[* 아주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으며, 이유도 고작 '니나와 닮아서'였다고 한다.] 성격 차이와 쇼스타코비치의 자녀들과의 트러블 등으로 인해 겨우 3년 만에 이혼했다. 1962년에 이리나 수핀스카야와 마지막으로 결혼했고, 이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음악출판사에서 일하던 이리나는 나이가 자식뻘만큼 차이가 났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편집과 초연 준비 등 음악적인 면에서도 도움을 주었고, 쇼스타코비치 사후에도 생전의 반려자로서 중요한 증언들을 남겼다. 지인들로는 화가 보리스 쿠스토디에프, 음악학자 이반 솔레르틴스키, 작가 미하일 조셴코, 극작가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 [[소련군]] [[원수(계급)|원수]] [[미하일 투하쳅스키]], 지휘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첼리스트 겸 지휘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등이 중요하게 언급된다. 그러나 메이에르홀드와 투하쳅스키는 대숙청 기간 동안 목숨을 잃었고[* 공교롭게도 둘 다 당시 비판당하던 쇼스타코비치에 대해 적극 변호하던 도중에 숙청당했다. 각 분야에 있어 거물급이었던 두 인물이 목숨을 잃고, 신예 작곡가였던 쇼스타코비치가 살아남은 것은 아이러니한 일.], 조셴코도 특유의 풍자적인 시 때문에 스탈린에게 찍혀 작품 활동을 금지당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주변인들의 이러한 불행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중에서도 가장 죽이 잘 맞았던 벗은 이반 솔레르틴스키였는데[* 같이 [[구스타프 말러|말러]]를 재평가하고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스크랴빈]]을 까는 등 음악적 견해가 일치하였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위기에 빠질 때에도 보란듯이 쇼스타코비치를 옹호하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급사하였고 쇼스타코비치는 그를 추모하여 피아노 3중주 제 2번을 작곡하였다. 솔레르틴스키의 유대 혈통을 의식해서인지,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에 유대의 선율을 인용하였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대 성향은 그의 일생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났으며, "유대 민족시에서"(1948) 등 유대인 선율에 대한 의식적인 인용 등으로 나타난다. 다만 말년의 [[교향곡 제13번(쇼스타코비치)|교향곡 제13번]] 등에서의 유대인 학살 폭로는 당국이 보기에도 오버스럽게 여겨졌고, 결국 쇼스타코비치의 운신의 폭을 좁히게 되기도 한다. || [[파일:external/lesleychamberlain.files.wordpress.com/shostakovich_at_football_match_300_thumb.jpg|width=400]][br]축구를 관람하는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지인들. 우측 아래가 쇼스타코비치다. || 열혈 [[축구]] 팬으로서 축구 심판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팬이었다고 한다.[[http://news.bbc.co.uk/sport2/hi/football/teams/r/rangers/7398400.stm|#]] 구단측에서 그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한 행사를 열기도 하였으니 확실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http://en.mediastore.fc-zenit.ru/gallery/11567/|#]] 인간적으로는 전형적인 '러시아인' 그 자체였다고 하는데, 음식도 뻴메니(러시아식 만두)나 블린늬(러시아식 팬케이크)같이 소박한 것을 즐겨먹었고, 좋아하던 술도 [[보드카]]였다. 우리 식으로 치면 대작곡가라는 사람이 자장면이나 부침개 같은 소박한 음식을 즐겨먹었던 것. [* 쇼스타코비치에게는 보드카 (러시아어로 체크슈카 (Chekushka))에 관한 일화가 많다. 쇼스타코비치의 마지막 제자이자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미국과 이태리에서 활동해온 작곡가 야코프 구바노프의 DSCH저널 2023년 1월호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교수가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1951년 3월 쇼스타코비치는 24일간 모스크바 근교의 한 오두막집에 머물며 24개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작곡하며 머물렀는데 하나의 곡을 완성할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보상으로 250ml 보드카병을 마시고 바흐와 바커스를 연관지어 빈 병을 그 제물로 눈 더미 속에 던졌고 나중에 눈이 녹은 뒤 24개의 병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한 병은 마시지 않은채 발견 되었는데 나중에 이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에 대한 선물이었다고 한다[[https://dschjournal.com|#]].] 하지만 술과 담배를 평생동안 즐긴 탓에, 이것이 건강 악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시간 감각이 정확하다 못해 앞질러나가는 스타일이었고, 주변인들이 이를 맞춰주느라 진땀을 뺐다는 일화도 있었다.[* 이를 가지고 쇼스타코비치 음악에 나타나는 강박성이나, 피아니스트로서 쇼스타코비치의 연주 스타일을 유추하는 음악학자들도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지극히 예의바르고 겸손하면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성격이었고, 자신의 힘이 닿는 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려 하는 섬세한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공격당할 '꺼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사소한 대화를 할 때에도 뭔가 확실히 하지 않고 알송달송하게 에둘러 암시적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소련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적인 화술이었지만, 어떤 지인은 '아니오'라고 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자신이 음악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올랐던 중년 이후에는 젊은 작곡가들이나 예술인들이 부당하게 당이나 정부로부터 공격받을 때 구명을 위해 힘쓰기도 했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나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경우 오히려 종교적인 입장이나 과거 행적을 이유로 변호는커녕 비판 대열에 함께하는 등 다소 모순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말년의 회고록인 '증언'에서도 잘 기술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